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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정치 [1] [2] [3] [4]

'칼빈주의와 종교'라는 긴 터널을 지나서 이제 그의 세번째 강연으로 들어간다. 이 세번째 강연에서 다루게 될 국가(혹은 정치)의 영역은 인간 생활의 세속적 영역으로는 첫번째이다. 카이퍼가 첫 강연에서부터 칼빈주의를 '삶의 체계'로 내세우면서 강조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종교적인 면에서의 칼빈주의만을 말할 때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생활의 한쪽으로 치우치게 이해하고마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가 오직 교회적, 교의적 운동을 대변할 뿐이라는 비역사적 주장을 참지 못한다.

카이퍼는 정치 발달에 미친 칼빈주의의 영향력을 보이기 위해 다시 근본 원리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 근본원리는 바로 '(가시적이거나 불가시적인)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주권'은 1)국가, 2)사회, 3)교회에 나타나는 주권으로 인류에게 부여되는 근본적인 주권이다.


그 가운데 먼저 국가라고 규정되는 정치 영역에 나타난 주권을 살펴본다.

우리는 국가를 형성하려는 충동이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출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전체 인류와 유기적으로 연합하도록 하신 것에 기인한다. 우리는 모두 한 인류이고, 한 피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 전체는 하나의 유기적 공통체를 이루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은 대륙으로 나누어지고, 대륙은 또다시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져 여러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인류의 유기적 통일성을 깨뜨린 것은 죄였다. 죄가 인류를 서로 다른 구역으로 나누었다. 죄의 세력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는 한, 하나의 국가를 이루겠다는 제국주의적 발상도 헛되며 무정부주의도 망상에 불과하다.

죄가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다. 죄없는 세상에서는 커다란 유기적 공동체가 있을지언정, 인간들에게 필요한 법령이라든가 통제, 규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 제도는 이를테면 부러진 다리에 필요한 목발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 형성, 행정관의 권력, 질서를 강제하는 모든 기계적 수단 등은 언제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리의 본성은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권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권력을 더욱 더 남용하게 되고 폭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권위와 자유간의 전쟁이었으며, 권위가 독재로 변질될 때 사람들이 갖는 자유를 향한 내면적 갈망은 권위를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칼빈주의는 이 양립된 개념들 즉, 국가의 본성과 권위에 대한 개념과 자유를 변호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칼빈주의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이 죄 때문에 행정관을 세우셨다'는 명제이다.

국가 생활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숨어있다. '수많은 국가'라는 어두운 면은 우리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기계적 통치 가운데 오히려 죄악이 독재적 야심을 부추길 수 있다. 반면에 타락한 인류에게 '정부나 지배 권위가 없는' 밝은 면은 하나님께서 홍수 가운데 심판하셨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칼빈주의는 이 두 가지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칼빈주의는 국가와 행정관 제도를 하나님께서 주신 보조 수단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국가 권력에 숨어있는 위험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많은 민족과 나라로 나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이 두려움을 억제하고 이 혼란에 질서를 회복시키고 바깥으로부터 오는 강제력이 인류 사회를 하나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신다. 이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연역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되는 칼빈주의의 두번째 정치적 명제는, '이 땅에서 정부의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다. 사람의 아들에게 낮게 절함으로써 스스로 추하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 순복하면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행정관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창조 때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영광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서 생명과 사망의 권세를 받았다. 모든 정치적 권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고, 그런 이유로 인하여 정의는 거룩한 성격을 갖는다.


칼빈은 군주제, 귀족제 등의 제도 역시 실현 가능한 정부 형태로 인정하였지만, 국민이 자기 행정관을 뽑는 공화정(민주제)을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봤다. 기존의 규칙이 사라진 곳에서 보통 투표가 석권하고 있다. 최고의 권위가 무질서한 곳은 승계권 결정의 결여나 혁명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그 대표자로 하여금 최고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물론 칼빈은 한 민족과 국가에 가장 바람직한 조건(민주제)을 수여하지 않으실 주권적 권세도 또한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같은 신정이 아닌) 모든 세상에 타당하고 유효한 칼빈주의의 정치적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만이 국가의 운명에 관하여 주권적 권리를 갖고 계시며 어떤 피조물이라도 이런 권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나라들을 만드셨고 그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보존하며 그 규례로 그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2. 죄는 정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친정을 파괴했다. 그러므로 권위의 행사는 통치의 목적상 기계적 치료책으로 사람에게 입혀졌다.
  3. 이 권위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엄위로부터 그에게 내려오는 권위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동료 인간에 대한 권세를 결코 갖지 못한다.

칼빈주의의 신앙고백과 정반대의 두 가지 정치이론이 있는데, 하나는 프랑스의 '국민주권설'이고, 또다른 하나는 독일의 '국가주권설'이다. 국민주권설은 프랑스 혁명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칼빈주의 세계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들의 사상과 비교가 된다. 실로 프랑스 혁명은 스페인과 맞섰던 네덜란드 혁명이나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이 세 가지 칼빈주의적(?) 혁명들은 기도하는 입술과 하나님의 도움을 믿는 신뢰로 이루어졌지만, 프랑스 혁명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대했다.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다"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빈 보좌에 인간이 앉았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고, 모든 권력이 인간에게서 나온다. 사람은 개인에게서 국민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옮겨지고, 그 안에서 모든 주권의 가장 깊은 원천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국민주권이며, 무신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더 비참해지는데, 하나님을 대적하여 건방지게 주먹을 쥐었지만, 결국 '사회 계약'이라는 미명하에 동료 사람 앞에 굽신거리게 되는 꼴이란... (칼빈주의 영역에서는 무릎은 하나님께 꿇지만, 머리는 인간 앞에 자랑스럽게 쳐든다!)

국가주권설은 한 마디로 독일 철학적 범신론의 산물이다. 국민주권설에서처럼 국민을 집합체로 보지 않고 유기체로 올바르게 보기는 하였지만, 이 유기체는 국가라는 신비한 존재의 의지를 작용할 뿐이라고 이해하였다. 끊임없이 발달하는 이 국가의 의지는 다향한 형식으로 자신을 구현하며 심지어는 스스로 계시하고 자신의 주권을 주장한다. 이 국가는 자기 위에 아무도 없어서 사실상 하나님이 된다.


칼빈주의는 무신론적 국민주권설과 범신론적 국가주권설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가운데 모든 권위의 원천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유기적 사회의 자연스러운 고리와 행정관의 권위가 부가하는 기계적 매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의 요구를 인정하도록 하기 때문에 권위에 복종하기가 쉽다. 또 그 차이는 현존하는 법률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권세의 원천을 보게 하기 때문에 법률의 불의성에 쉬지 않고 항거하도록 해 준다.

[계속 글이 이어집니다.]

요약/편집 : 나쥬니 (nazun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