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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학문 [1] [2] [3] [4] [5] [6]

이제 세번째로 칼빈주의가 학문의 본질적인 자유를 어떤 식으로 발전시켰는지 살펴보자.

자유와 진정한 학문과의 관계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우리의 관계와 같다. 물고기가 참으로 자유롭게 살고 번성하려면 온전히 물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처럼 모든 학문은 자신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고유한 방법이 요구하는 바를 엄격하게 지킬 때에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학문의 자유는 방종이나 무법에 있지 않고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그 속박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학문에 꼭 필요한 원칙에 뿌리를 박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에는 국립 대학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학문이 '학자의 공화국(respublica litterarum)'을 만들었다고 흔히들 생각했는데, 그에 대한 자유의 침해는 국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역(교회)에서 왔다.


공화제적 조직체제의 도입

수세기 동안 인간 생활에는 두 가지 지배적인 권력이 있었는데, 곧 교회와 국가였다. 몸과 영혼의 이분법이 이런 인생관에 반영된 것으로, 교회는 영혼이고 국가는 몸이었다. 제3의 권력은 없었다. 교회 권력은 교황에게, 국가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 이원론이 갈등을 일으켜 좀더 높은 통일성이 요구되었을 때 교황과 황제는 대권을 두고 격렬하게 부딪히곤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로 제3의 권력으로 학문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13세기 말, 학문은 대학 생활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교황과 황제에 독립된 존재를 주장했다.

대학의 공화제적 특성은 모든 군주제적 열망의 배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는 그 제3의 권력의 성장을 경계하고, 대학을 자신의 통치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모든 일을 시도했다. 그 당시 모든 대학이 확고한 태도를 취했다면 학문의 자유는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에 밀려난 약한 대학들은 교황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강한 대학도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근본악이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학문은 독립적 특성을 포기했다.

우리의 의식을 통해 우주에 대한 지적인 내용을 수용하고 반성하는 학문의 영역이 교회와 전혀 다른 영역을 형성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었다. 종교개혁은 이 악을 억제했으며, 칼빈주의는 그 악을 정복해 버렸다. 칼빈주의는 교회 안에서 군주제적 위계제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공화제적이며 연방적인 조직을 도입했다. 그리하여 대학을 다스리는 영적인 교회라는 머리는 사라졌다.

루터교도들에게 그 (대학을 다스리는) 가시적 머리는 땅의 통치자였다. 그들은 이 통치자를 '제1주교'로 존경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를 다른 영역으로 구분했던 칼빈주의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들의 체계에서 박사 학위 증서는 여론이나 교회의 동의, 교회의 규례로부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기관의 학문적 특성에서 의미를 가졌다.


교회는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대학에 대한 교황의 보호와는 상관없이 교회는 또다른 압력을 학문에 가했다. 교회는 혁신자들이 표현한 의견과 출판한 저술 때문에 그들을 괴롭히고 비난하고 핍박했다. 로마는 교회 안에서 옳은 것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말의 자유를 반대했다. 오직 (교회가 인정하는) 진리만이 사회에서 자신을 선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학문의 자유를 해쳤다. 교회 관할권이 해결할 수 없는 학문적 문제는 시민 법정의 판단에 맡겨졌다. 갈등으로 움츠러든 사람은 침묵을 지키거나 상황에 순응했다. 그리고 반대에 맞섰던 사람은 날개가 잘린 채로 벌을 받았다. 그가 잘린 날개로 날아보려고 하면 목이 비틀어진다. 아주 대담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결국 종교 재판과 단두대를 만나고 말았다.

자유로운 탐구의 권리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알 수 있고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알려져 있고, 그것도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 당시 교회는 학문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원리인 '삶을 위한 투쟁'도 몰랐다.

칼빈주의는 일반 은총의 영역을 발견함으로써 이런 해로운 입장을 버렸다. 칼빈주의는 교회가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하며, '일반 은총'의 넓고 자유로운 영역이 교회의 통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결과로, 형법의 형벌은 점점 사문화한 법률로 축소되었다.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믿음의 확실성'

또 하나, 학문이 융성하기 위하여 대중의 마음이 자유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는 삶의 유일한 목적을 그 공로를 통해 하늘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교회가 이 주된 목적과 일치한다고 인정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도 지상적 실존에 대한 연구에 공감을 갖거나 헌신할 수가 없었다. 영원한 구원을 열망하는 일 말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주에 관하여 웅대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은 납득될 수 없었다. 칼빈주의는, 지상의 삶이란 하늘의 복된 상태를 공로로 얻도록 정해져 있다는 모든 생각을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뿌리째 잘라버렸다.

모든 참된 칼빈주의자에게 이 복된 상태는 '중생'에서 자라며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보증된다. 이 '믿음의 확실성'을 근거로, 칼빈주의는 기독교 세계에게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 가운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순례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칼빈주의는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지상의 중요한 일을 행해야 하는 순례자가 되었다.

인간은 이 무한한 전체 영역에서 일해야 했다. 칼빈주의는 열정과 정력을 갖고 이 노동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땅의 모든 것은 사람에게 종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땅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고, 대양과 자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자연의 속성과 법칙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문을 권장하기를 꺼리는 백성이 새롭고 활기 넘치는 힘으로 자유의 느낌을 향유하도록 학문에 박차를 가했다.

[계속 글이 이어집니다.]

요약/편집 : 나쥬니 (nazun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