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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학문 [1] [2] [3] [4] [5] [6]

마지막으로, 칼빈주의는 학문적 원리의 갈등에 신속한 해결책을 제공했다.

자유로운 탐구는 충돌에 이르고, 그 결과로 학파와 사조가 생긴다. 낙관주의 vs 비관주의, 칸트학파 vs 헤겔학파, 결정론자 vs 도덕론자, ... 모든 곳에서 대립하는 이러한 논쟁이 그 원리들의 상이성 때문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부수적인 갈등들은 모든 나라에서 지성을 격렬하게 혼란시키고 있는 원리의 갈등에 완전히 가려진다. 이 원리의 갈등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신앙고백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이신론과 범신론과 자연주의 안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갈등이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이 갈등은 신앙과 학문의 갈등이 아니다. 그런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학문은 어느 정도 신앙에서 출발하지만, 반대로 학문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거나 미신이다. 참되고 진정한 신앙은 그렇지 않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특별히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원리에서 신앙을 전제한다. 이는 학문적 탐구에 필요한 모든 공리가 우리의 자의식과 더불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반면에 모든 신앙은 발언하려는 충동을 내적으로 갖고 있다. 이를 위하여 신앙은 말과 용어와 표현을 필요로 하고, 이 말들은 사상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이 사상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함께 상호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우리의 의식에 빛을 비추자마자 학문과 논증의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갈등은 신앙과 학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비정상적 상태인가 하는 주장 사이에 존재한다. 만일 우주가 정상이라면, 우주는 잠재력에서 이상(ideal)으로 가는 영원한 진화의 의미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주가 비정상이라면, 과거에 혼란이 일어났고 그 목적의 최종적 달성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중생적 능력뿐이다. 이 대립은 학문의 영역에서 사유하는 두 가지 지성을 전투 대형으로 나눈다.


정상론자 vs 비정상론자

정상론자들은 자연적 자료 이외에는 의존하지 않으려 하며, 모든 현상에서 동일한 해석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추론을 파괴하거나 제어하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한다. 그들도 형식적 의미에서 신앙을 존중하지만, 신앙이 인간의 일반적 자료와 조화를 이루는 한에서나 그렇다. 특별히 기적은 존재하지 않으며, 냉혹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자연법만 존재한다. 죄는 없고 저급한 도덕적 입장에서 고등한 도덕적 입장으로 진화가 있다. 그들이 아무튼 성경을 허용한다면, 인간의 작품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모두 잘라내는 조건에서 허용한다.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인간적 발달에서 생긴 산물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한 신 또는 최고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가지론에 따라 가시적 우주 뒤에 숨어있거나, 범신론적으로 모든 사물 속에 숨어 있거나, 인간 지성의 이상적 반영으로 간주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창조 개념을 거부하며, 진화만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에 비정상론자는 상대적 진화를 공정하게 판단하지만 무한한 진화를 반대하여 원초적 창조를 고수한다. 그들은 인간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인간을 독립적 종으로 본다. 그들은 죄를 우리의 원래 본성의 파괴로, 따라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역으로 본다. 그 때문에 그들은 기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을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주장한다. 중생의 기적, 성경의 기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적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중생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상적 규범을 계속 발견한다.


두 학문 체계의 대립

이 두 가지 학문적 체계가 각자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서로 대립한다. 이 두 학문은 모두 인간 지식의 전체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최고 존재에 관한 제안을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출발점으로 갖는다.

정상론자와 비정상론자의 이 두 가지 학문 체계는 서로를 인정하는 상대적인 대립자가 아니다. 그것들은 전체 영역에서 서로 다투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주장을 전체 체계 위에 세우려는 노력을 단념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신의 출발점을 신실하게 믿지 않는 것이며, 진지한 전사가 아니다.

성경의 가능성을 자신의 체계에 아주 작게라고 갖고 있는 정상론자는 이중적인 학자이며 학자의 이름을 상실한다. 반면에 창조를 진화로 변형시키며, 중생과 그리스도와 성경을 인간적 원인의 결과로 설명하려고 하는 비정상론자 역시 이중적이며 비학문적인 사람으로 우리의 대열에서 추방해야 한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기원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우리는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선택하든 모든 것에 있어서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세계를 정복한 정상론자의 세계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비정상론자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발언해왔지만 도전을 별로 받지 않았다. 물론 모든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비웃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1,000년 동안 학문적으로 이러한 보편적 확신에 반대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르네상스는 불신앙의 경향을 은근히 장려했고, 인문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이상을 향한 열정을 창출했으며, 중세 말엽 정상론자의 반대가 시작되었지만 그 후 수세기 동안에도 전통적인 학문 체계의 기초를 손대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에 반대의 의견이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철학은 최초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를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했다. 비정상론자를 반대하는 데 일치하는 다양한 철학적 체계로 서서히 발전되고, 점차 법학, 의학, 자연과학, 역사학의 영역에서 무한한 정상적 과정이라는 새로운 가설을 그들 학문 탐구의 출발점으로 도입했다. 결국 정상론자의 세계관이 주도적 중심에서 세계를 정복했다.

신학자들은 변증학적으로 자신의 명분을 옹호하려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신학 체계의 왜곡을 가져왔다. 특히 독일의 유능한 신학자들은 이 (정상론적) 철학 체계 가운데 하나를 기독교를 지지하는 버팀목으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와 같이 철학과 신학의 혼합에서 생긴 첫번째 결과는 소위 '화해의 신학(mediating theology)'이었다. 이 신학은 신학적인 부분에서 좀더 빈곤해지고, 철학적인 부분에서 점점 풍요해져서 마침내 현대신학을 발생시켰다. 그리스도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셨다고 하고, 성경을 저술 모음으로 바꾸고, ...

[계속 글이 이어집니다.]

요약/편집 : 나쥬니 (nazun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