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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정치 형태는 상하원이 있는 내각책임제였다.
그리고 자유당, 보수당, 카톨릭당, 반혁명당의 구도로 정당체제가 자리잡혀 있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자유당과 보수당이 주로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서로 정권을 주고받았다.
자유당과 카톨릭당, 그리고 보수당과 반혁명당이 자주 연합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립학교 등의 문제로 인하여 자유당, 보수당의 좌파와 카톨릭당, 반혁명당의 우파 간의 대립이 생겼다.
카톨릭당과 반혁명당은 서로 기독교나 정치 철학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지만, 사립학교 설립 같은 문제에 있어서 충분히 뜻을 모을 수 있었다.

1879년 11명의 의석을 차지한 반혁명당은 카이퍼의 주도적인 활동하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883년 선거에서 반혁명당과 카톨릭당의 우파는 86명 중 37명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7년 하원 의석수가 86명에서 100명으로 증가되면서 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1888년(51세) 선거에서 반혁명당은 28석, 카톨릭당은 26석을 얻어 모두 54석으로 과반수를 넘었고 막케이 수상이 이끄는 연대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막케이 수상은 곧바로 국민학교(국공립) 교육 법률안을 고쳤다.
비록 많은 지원금은 아니었지만 사립학교에도 정부가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으로 국회가 공립학교와 비공립학교의 평등을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891년 다시 자유당이 52석을 차지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반혁명당은 20석을 차지하였는데, 이제 반혁명당은 군소정당이 아니었고 한 목소리를 내며 여론을 움직이는 어엿한 국정 파트너였다.
"Patrimonium"이라는 화란 기독교 노동자 협회는 반혁명당과 연대하여 카이퍼 박사를 지도자로 지목했다.

카이퍼는 신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그리고 교회 개혁 운동가였고, 정당 당수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 분야 언론인이었다. 정력적인 연설가였고, 많은 책을 쓴 저술가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못다 이룬 비전들...

당시 카이퍼를 비롯한 반혁명당 인사들에게 쏟아진 비난도 있다.
"칼빈주의자들과 카톨릭교도들이 무슨 연합이란 말인가!"
카이퍼 자신도 흐룬이 반혁명당을 이끌었던 정치 입문 시기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않았었다.
정치 연합은 사상 연합이 될 수 없다.
신학적으로 카톨릭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연합한다는 것은 카이퍼 박사에게는 또다른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뜻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그의 연설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사람들을 끓게 만들었다.

이제 그도 50세가 넘어섰다...


"우리 정당이 십자가의 기치 아래 모여서 개인적인 명예나 권력, 고관직이나 금전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영광스런 미래, 조국의 신앙적인 구원을 위해서 영웅답게 전쟁에 임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순교자의 피가 물들어져 있는 이 땅에서 그에게 대적하기 보다는 할렐루야 하고 외치며 주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찾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1891년 5월 반혁명당 전국대회 연설 중에서

요약/편집 : 나쥬니 (nazun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