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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2년(55세) 카이퍼 박사는 다시 자유대학 총장으로 봉사했다. (1년 임기의 총장직으로, 그에게는 이번이 세번째)
그는 신학교수였지만, 그의 교수활동이 신학분야의 역할을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수많은 강의와 저술, 그리고 연설 등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헤라우트지라는 '자유발언대'가 있었다. (헤라우트지는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간지였고, 슈탄다트지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일간지였다. 모두 카이퍼가 편집장이었다.)
보다 더 일반적인 주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적 신문 논설을 통해서 대중을 깨우쳤고, 오히려 그의 많은 책들은 그 논설들을 모아 책자로 발간한 것들이었다.

1886년 카이퍼를 중심으로 국가교회에서 탈퇴하여 형성된 개혁주의 그룹은, 그동안 기독교 개혁교회(1830년 조직)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개혁주의자들과 이제 같은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교회 연합을 이루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 통합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 개혁교회 소속의 캄펀 신학교(여기엔 그 유명한 헤르만 바빙크 교수가 있었다.)와 카이퍼가 이끄는 자유대학이 서로 공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개혁주의의 통합에 따라 카이퍼라는 강력한 인물이 통합된 교회의 독재자로 군림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에 화란 개혁교회라는 정식명칭으로 개혁주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기독교 개혁교회 400개와 1886년 회중교회 300개의 연합)

1894년 투표권의 대폭적인 확대를 두고 갈등을 빚던 카이퍼와 로만(자유대학 법학부 교수이자, 반혁명당 하원의원)은 결별을 했다.
로만은 반혁명당을 떠나 자유 반혁명당을 세워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로만1896년에 자유대학 교수직도 물러났다.)
그토록 자신에게 등원을 요청하던 로만이 떠났는데, 결국 카이퍼는 다른 이유에서 1894년 슬리트레히트 지역 하원의원이 되었다.

(1895년에 카이퍼 박사는 루트헤르스 박사, 바빙크 박사와 함께 현대어법의 언어로 된 성경을 발간했다.)

1896년 화란 개혁교회 총회는 훗날 개혁주의 선교의 대헌장으로 유명하게 된 선교원칙을 채택하였다. (이때에도 카이퍼는 헤라우트지를 통해서 선교의 올바른 위치를 역설하였다.)

1897년(60세) 슈탄다트지 창간 25주년 행사는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았다.
캄펀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헤르만 바빙크 교수가 연설을 하였고, 가톨릭당의 지도자였던 스카에프만 박사는 카이퍼를 '우리 시대 최고의 언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 기념일엔 모든 화란언론이 경의의 표시로 휴간을 단행했다.

1897년 6월에 투표권을 확대하여 치루어진 선거에서 좌파(자유당,사회주의당,급진주의당) 55석, 우파(반혁명당, 자유 반혁명당, 가톨릭당) 45석으로 자유당 중심의 내각이 구성되었다.
카이퍼는 이 선거에서도 하원에 등원하게 되었고, 자유당은 점점 기반을 잃고 있었으며, 로만이 이끄는 자유 반혁명당은 반혁명당이 석권하지 못한 진영에서 지지자를 확보함으로써 오히려 우파를 강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1898년 8월 카이퍼는 미국을 방문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명예 법학학사 학위를 받았고, 10월 그 대학에서 6개의 칼빈주의 강의를 했는데, 이것은 아직도 고전으로 남아 있다.

1898~9년 그에게는 이제 네번째인 자유대학 총장직을 수행하였다.
1899년 그는 그의 아내와 사별하였다.

1899년 헤이그에서 세계사상 최초의 평화협정이 있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보어족에게는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았는데, 카이퍼는 하원회의, 국내외 신문기사, 서신 등을 통해 그에 대해 강력하게 반박했다.
곧 보어전쟁(영국이 침공)으로 그 이유가 드러나자 그는 슈탄다트지를 통해 유럽내외의 여론을 보어족을 옹호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1901년은 4년마다 열리는 선거가 있는 해였다.
4월 1일, 반혁명당 전국대회 의장으로 나선 카이퍼는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전쟁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유주의자의 정책 속에 스며있는 정치적 문제 및 정부문제에 있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신입니다.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극도로 혁명원리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하게 정치학과 실제 정치에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거만한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결국 선거에서 우파가 58석, 좌파가 42석을 차지했다.
반혁명당이 24석, 자유 반혁명당이 7석, 가톨릭당이 25석, 프리즐란드 기독교 역사주의당이 1석, 기독교 역사주의당이 1석을 차지했고, 자유당을 정치 교두보에서 몰아내고 말았다.

빌헬미나 여왕은 새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카이퍼 박사를 초청했다.
카이퍼는 수상 겸 내무상을 맡았다.
1901년 8월 카이퍼 내각이 출범했다.


"본인은 이 하원에서 인간의 불행한 일과 싸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보험제도를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려 합니다."

- 1899년 10월 25일 하원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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